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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역사 (1) 계몽주의 시대의 역사적 사건 - 영국혁명

인권의 이해

by 뜌뜌뜌뜌뜌 2023. 7. 2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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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시대
 인권개념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동서양의 여러 철학- 종교, 경전 등-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각각의 사상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목표는 달랐다 해도, 보편적인 선(善)을 추구하는 기본적인 사상에 기반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상들이 분명 인권 개념의 형성에 주요한 영향을 미친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적 인권개념은 서구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각각의 종교나 경전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그 원인으로 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각각의 사상들을 사람들에게 권고하는 방식이나 종교와 경전의 지향점, 즉 세속적인 삶을 떠나 수도자와 같은 삶을 지향한다던가 하는 점 등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많은 이유들 중에서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개인의 권리나 법을 중시하는 서구의 사상이 인권개념을 특징짓는 데 있어, 주요하게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봉건제 몰락 후 중상주의가 대두되고 계몽주의 시대와 19세기 산업혁명 시대를 거치는 동안 억압받던 민중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자,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필연적으로 인권의 발전을 소환한 측면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인권이 늘 발전만 해 온 것은 아닌데, 인권은 역사 속에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기도 하고, 때로 더디기도 했지만 분명히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그 과정 속에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만 하는 굵직한 사건들을 알아보겠습니다.

 

(1) 계몽주의 시대의 역사적 사건

① 영국혁명
㉮ 영국혁명의 역사적 의미
 서구의 계몽주의 시대에는 민주주의, 나아가 인류 역사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들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이때는 인권 담론이 발전하고 확장될 수 있는 단단한 토대를 구축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16∼17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과 과학 기술의 발전, 그리고 중상주의의 발전으로 인한 중산층의 대두입니다. 이로 인해 과학을 기반으로 한 
이성적 사고의 추구, 법치와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는 사상이 영국 혁명과 미국 혁명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게 된 것입니다.

 

㉯ 영국혁명의 과정
 영국 혁명이란 17세기에 일어난 청교도혁명(1642∼1648)과 명예혁명(1688)을 포괄하여 이르는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의 뒤를 이어 왕 위에 오른 제임스 1세(James I, 1566∼1625)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면서 영국 의회를 부정했고, 그 다음에 등장한 찰스 1세(Charles I, 1600∼1649) 역시 의회를 누르고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습니다. 찰스 1세는 1637년 스코틀랜드의 내란을 진압하기 위한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11년 만에 의회를 소집했습니다. 그러나 의회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을 포함한 의회의 의원들이 왕실의 권위에 도전했습니다. 그 결과 의회군이 승리하여 1649년 1월에 찰스 1세가 처형되고 공화국이 수립되었습니다. 왕실의 절대권력이 무너지고 의회는 주권을 회복한 것입니다. 이것이 청교도 혁명입니다. 이 과정에서 보편적 권리 주장이 처음으로 등장했습니다. 처음에 크롬웰은 생명권, 재산권, 종교의 자유와 같은 대중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수평파(Levellers)와 같은 급진주의자들과 손을 잡았지만, 나중에는 이들을 군대에서 추방하고 숙청했습니다. 수평파 내에서 공산주의 성향이었던 디거스(Diggers)-사유 재산의 폐지를 주장하고, 부의 재분배를 촉구-의 주장도 힘을 잃었습니다.
 수평파는 하인이나, 걸인 또는 다른 사람에게 적선을 받는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투표권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자유 소유 토지에서 나온 재산이 있거나 교역권 특허장을 받은 사람만이 투표권이 있다고 주장한 독립파(크롬웰과 같은)의 주장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개인의 재산소유권이나 경제적인 자립에 따라서 
정치적 자유를 갖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 디거스는 재산 공유제 실시를 요구하면서 극빈층도 토지를 경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거기에 법적 정치적 민주주의를 추가로 요구했습니다. 디거스의 주장은 공화정 정부에서도 호응을 얻지 못했고, 지주들의 거센 반발을 사다가 1650년에 해산당하고 말았습니다.

 

㉰ 영국혁명의 결과
 영국에서 혁명의 정신은 1660년 찰스 2세(Charles Ⅱ, 1630∼1685)가 왕정복고로 즉 위하면서 그대로 사그라지는 듯 했으나 40년 후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부르주아들이 의회의 권력 장악과 시민적 권리를 위해 투쟁한 명예혁명을 통해 혁명의 정신은 다시 조명을 받게 되었고, 이것이1689년에 공표된 권리장전 으로 성문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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