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제주 잠녀 항쟁 : 오래 참은 숨, 마침내 빗창을 움켜쥐고

여러가지 지식

by 뜌뜌뜌뜌뜌 2023. 8. 2. 21:52

본문

728x90
반응형

출처 : 픽사베이

제주해녀박물관과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공원이 위치한 북제주군은 전통적으로 나잠어업이 발달한 지역이자 1932년 제주 항일운동의 발상지입니다. 1932년 약 3개월에 걸쳐 연인원 17,000여 명이 참여한 이른바 제주잠녀항쟁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수탈에 대항하여 제주 해녀 수천 명이 빗창(전복 채취에 사용되는 쇠갈고리)을 들고 앞장서서 싸운 사건입니다.   1920년에 만들어진 해녀조합이 일제에 의해 제조합으로바뀌면서 잠녀의 이익 대신 일본인 무역상, 해조회사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은 물론 공관 부정이나 자금 횡령 등을 저지르면서 촉발되었으며, 부춘화(당시 25세), 김옥련(당시 23세), 부덕량(당시 22세)을 대표로 하여 민혁동맹 소속 오문규, 김순종, 김시곤, 문도배, 김성오, 강관순, 신재홍, 한영택, 한원택, 한향택, 고사, 채재오 등의 지원으로 준비되었습니다. 그들은 1931년 6월부터 일제 수탈사건의 진상, 일제의 침략성과 불법적인 단
압을 규탄하는 격문을 섬 신체에 살포하여 도민들의 의분을 모았고, 리·면도에 걸쳐 풀뿌리 조직기섬을 마련, 요구조건과 투쟁방침을 수립하는 등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하였습니다.
1932년 1월 7일, 세화 장날인 이날 제주해녀들은 손에 빗창을 들고 머리에 수경을 착용한 채 제주읍으로 향했습니다. 해녀 대표들을 선두로 한 300여 명의 해녀들이 세화리에 들어서자 장터에 모여 있던 도민들이 합세하어 그 수효는 수 천명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면사무소에 도착한 시위대가 해녀 대표들을 통해 요구조건을 면장에게 제시하지만 면장은 자신의 권
한 밖의 일이라며 "12일 도지사가 오면 해결해주겠다"고 약속했고, 이에시위대는 일단 해산합니다.
1월 12일 종달리 · 오조리 해녀 300여 명과 하도리해녀 300여명, 세화리 해녀 40여 명 등 700여 명이 세화장터에 다시 모였습니다. 여기에 오일장에 모인 도민들까지 합세한 시위대는 도지사가 있는 제주읍으로 향하던 중 차를 타고 순시를 하던 도지사를 발견하고 차를 포위하였습니다. 이에 도지사는 차 안에서 해녀 대표와의 면담을 진행하는데, 그동안 차 밖에서는 일경들이 시위대의 무력해산을 시도하지만 해녀들의 완강한 저항을 막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도지사는 해녀들의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확답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도지사는 시위대의 포위에서 풀려나자마자 광주에 지원경찰을 요청, 이후 일경은 제주도 전역에서 좌경분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작전에 나서게 됩니다.
1932년 1월 23일 일경은 세화리의 문도배와 문도후, 종달리의 한향택과 한원택, 연평리의 신재홍 등 수십 명의 사람들을 검거했습니다. 1932년 1월 24일, 경찰의 연행을 저지하기 위해 100~500여 명에 이르는 해녀와 도민들이 나서서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50여 명이 다시 검거되는데, 해녀 대표인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을 비롯한 해녀 34명이
포함되었습니다. 이런 충돌은 우도 종달리 등지에서도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당시 하도리 소녀회 회장으로 항쟁을 직접 지도했던 고 김옥련은, 이 투정이 일시적인 생존권 투쟁이 아니라 민족교육을 실시했던 야학교사 강관순, 오문규, 김순종 선생 밑에서 지도를 받은 해녀들이 중심이 되어 확고한 신념을 갖고 지속적으로 주도해갔던 것이라고 생전에 증언한 바 있습니다. 김옥련은 "당시 체포된 후 만취한 일본경찰로부터 물고문, 무릎누르
기 등 숱한 고문조사를 받았다"며 "전복을 따기 위해 숨을 멈추고 물질하는 것과 같이 조금만 참으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어려움을 이겨냈다"고 술회한 바 있습니다.
 잠녀항쟁의 결과, 공동판매제도와 특정상인 지정제가 폐지되고 육지 출가 문제 등 일부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항쟁의 결과는 미미했지만 제주잠녀항쟁은 기중단위의 반일·반제의 항일운동으로 역사적 의의가 깊습니다.
국가보훈처는 2005년 강관순, 김옥련 등 잠녀항쟁 유공자 11명에 대하여 독립유공자로 포상하고 유족들에게 포상금을 지급했습니다.
2005년 8월 15일, 1932년 제주잠녀항쟁의 의미와 경과를 간략히 적은기념비와 강관순 작사 <해녀 노래> 노래비가 제주도 본섬인 구좌읍 세화리와 상도리 하도리 경계시점에 세워졌습니다.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