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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아발달의 기본개념 - (2) 영아연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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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뜌뜌뜌뜌뜌 2023. 6. 3.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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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아 연구의 역사
1. 그리스 로마시대
옛 사람들의 영아에 대한 믿음이나 태도는 사랑과 잔인함, 자유와 제한, 인내와 비인내의 혼합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헌에 의하면 영아에 대한 양육태도는 비교적 거친 것이었습니다. 영아에게 애정표현은 잘 하지 않았고, 시민으로서 높이 평가되는 외모가 되도록 하기 위해 영아의 몸을 단단히 묶었습니다. 영아를 강하게 하
기 위하여 찬물로 목욕을 시켰으며 목욕을 시킬 때 두개골이 둥글게 되도록 머리통 을 눌렀으며 팔다리를 잡아당겨 폈습니다(Fogel, 2011). 이와 같이 성인의 신체에 대한 독특한 신념 때문에 영아의 신체를 조작하고 묶었던 예는 서구사회에서뿐 아니라 중국이나 멕시코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 발을 작게 하기 위하여 어려서부터 발을 묶었던 것이 그 예이며, 멕시코의 마야문명에서는 머리를 타원형이 되게 하기 위하여 머리를 묶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고대 로마사람들의 그러한 태도가 애정의 표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녀가 강하게 자라길 원했을 것이고 신체가 적절하게 균형이 잡히길 바랐을 것입니다. 로마에 대한 문헌을 보면, 특히 부유층에서는 부모와 자녀 간에 강한 헌신적 사랑이 있었으며, 영아기 이후 자녀가 성장하여 그만의 특성을 갖게 하기 위해 안아주고, 뽀뽀해 주고, 애정을 표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입증하는 예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아동을 위한 게임이나 놀잇감, 그리고 영아에 대해 애정을 품는 것과 영아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 등에 대해 기술하는 문서들을 볼 수 있습니다(Greenleaf, 1978),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로마에서는 원하지 않는 아기를 죽이는 영아살해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이 시대에 아기는 부모의 자산으로 여겨졌으며 건강하고 생산력 있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 부모의 책임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습니다(Borstelmann, 1983).
  고대 이스라엘의 구약성서에는 영아기와 유아기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로마와 그리스에서와는 달리 아기는 부모의 자산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며 보호를 받고, 사랑을 받고 교육을 받아야 할 신의 선물 이라 여겨졌습니다. 히브리인에게는 어디에서도 영아살해에 대한 기록이 없는데, 영아기에 대한 직접적 기록은 없으나 성서를 보면 영아는 사랑이 있는 보호를 받아야 하며, 바람직하고 성스러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적절한 축복이 주어져야 함을 시사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아울러 성서는 부모들이 자녀를 사랑하여야 할 뿐 아니라 교육을 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서에는 부모가 자녀를 사랑해야 함은 물론, 부모의 훈육이 너무 거칠거나 훈육이 없는 경우, 또는 부모가 자녀에게 종교적의식, 이상, 문화적 역사들에 대하여 교육을 하지 않을 경우,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가 이루어진다는을 나타내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2. 중세와 르네상스
초기 중세(A. D. 300-1100)는 로마 제국의 몰락과 더불어 기독교가 점차 유럽대륙에 전파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지방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었으며 동시에 제국이 몰락하고 지방 세력이 강해지는 정치적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도시 사람들의 교육에 기여했으나 질병과 영양실조, 무지, 공해 등으로 고통 받는 도시 빈곤층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아울러 공중위생의 부적절합과 공해는 도시 빈곤층의 영아사망율을 높이고 출생 시 감염으로 인한 부작용 등 여러가지 문제를 빚어 시골 사람들보다 질적으로 좋지 않은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도시는 사람들에게 가족의 뿌리를 잃
게 하고, 질병이 영아뿐 아니라 어머니까지 출산으로 인해 죽게 하는 일을 발생시켜 많은 고아들이 거리에서 살아가면서 거지나 도둑이 되고 매춘부가 되게 하였습니다.
  기원 후 400년경부터는 영아살해, 유산, 학대에서 아동을 보호하고 사랑을 하여야 한다는 히브리인의 자녀양육에 대한 믿음과 태도를 따라, 기독교 교회가 유럽의 자녀양육에 대한 믿음과 실제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영아 무덤에 비석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만약 부모가 자녀에게 잘못하였을 경우 고해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Fogel, 2011).
  중세 후반(A. D. 1100-1300)에는 출산과 영아에 대한 조언을 주는 몇몇 의학 서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12세기 이탈리아의 여의사인 트로토라(Trotola)는 밝은 빛이나 큰 소리로부터 영아를 보호하기 위해 꿀로 영아의 입천장
을 가볍게 맛사지 해주고 부드러운 소리의 노래와 함께 다양한 색과 감촉의 옷으로 영아를 자극하도록 조언하였습니다(Gies & Gies, 1987). 같은 시기에 영국에서는 올리브, 허브, 장미향으로 된 따뜻한 물 속에서 아기를 분만하는 수중분만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산파는 중년여성이었고 산모의 친구들이 같이 참여하여 아기와 산모에게 행운과 기쁨을 기원하여 주었다고 합니다(Hanawalt, 1993). 그러나 영아살해는 아직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부모가 참회로 고통을 받아도 영아살해는 오늘날처럼 죄가 아니었습니다. 13세기경 유럽에서는 영아살해의 대안으로 고아들의 입양을 위해 교회가 운영하는 휴식소가 나타났습니다. 이는 모든 생명이 신성하다는 신념과 세례를 받지 않은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기독교의 믿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르네상스기 (1450 -1650)에 들어서자 유럽에서는 자녀양육에 대해 쓴 글들이 출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자들은 당시 보모가 빈곤층의 여성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보모의 질병이나 습관을 아동이 이어받을 수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유명한 르네상스의 예술가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조각 기술을 석수의 아내었던 자신의 보모에게서 배운 것이라 농담하기도 했습니다(Gies & Gies, 1987).
 중세의 이동에 대한 생각의 변화는 그림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중세 초에는 영아의 그림이 마치 성인과 같은 모양이었으나 후반에 들어서면서 아동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여 예수가 영아로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그림은 옷을 입고 어른들에 둘러싸여져 있는 전형적인 그림이었습니다. 르네상스기에 들어서면서 영아와 아동은 성인과 다르며 달리 행동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비로소 아동들이 놀잇감을 가지고 노는 모습이 그림에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Koops, 1996).

 

3. 18, 19세기 르네상스기
아동에 대한 생각의 변화는 18세기에도 이어졌는데, 오늘날까지 영유아 발달연구에 영향을 미쳐온 두 철학자는 로크와 루
소입니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까지 생존하였던 로크 (Locke, 1632-1704)는 영국의 철학자로, 아동의 마음은 우리가 무엇이든지 써도 되는 백지(tabula rasa)와 같아 아동이 이성적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18세기를 살았던 루소(Rousseau, 1712-1778)는 아동은 선하게 태어났으며, 교육은 영아와 아동의 욕구와 기호에 맞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루소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자연이 이끄는대로 두면 바르고 건강한 발달이 이루어진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사회가 성격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음을 강조하였는데, 그의 저서 '에밀'을 보면 신이 만물을 창조했을 때에는 모든 것이 선했지만 인간의 손에 건네지면서 모두 타락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로크와 루소는 모두 건강한 발달을 위한, 고대 그리스의 신체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을 이어나갔습니다. 로크가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신체에 (a sound mind in a sound body)' 라고 한 말은 이를 잘 나타내는 것입니다. 루소도 아동은 뛰
고 달리고, 소리를 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19세기 유럽이나 북미의 교육과정에 예술, 음악, 체육 등이 포함된 것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Friedrich-Cofer, 1986).
  19세기는 18세기의 정신이 이어져 영아와 아동을 향한 사회적 책임에 대한 생각이 확장되었으며 아동이 가족이라는 개념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특히 19세기에는많은 철학자, 생물학자, 교육학자들이 자신의 자녀를 관찰하고
아동 전기(baby biography)를 발간하였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다윈의 아들 '도디'의 전기로 그는 이 전기에서 아들 도디의 성장과 행동을 자세히 관찰 기록함으로써 아동발달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습니다(Vasta, Haith, & Miller, 1995).
  그러나 영아와 아동발달의 과학적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세기 말이었습니다. 미국의 홀(Hall, 1846-1924)은 질문지법을 고안하여 아동발달에 대하여 최초로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홀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의 비네(Binet, 1857-1924) 아동연구의 과학적 접근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그는 1905년 지능검사를 만들어 아동의 지능을 측정하여 실제 교육현장에 적용시켰습니다.

 

출처 : 픽사베이

4. 20세기 이후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생존하면서 영아와 아동발달연구에 영향을 준 사람들로는 게젤, 프로이트, 왓슨, 피아제 등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게젤(Gesell, 1880-1961)은 영아와 아동의 신체크기, 운동기술, 행동의 발달적 변화를 주의 깊게 관찰 측정한 사람으로, 영아와 아동발달의 규준을 제시하였으며 최초로 일방경을 만들어 영아를 관찰한 사람입니다. 한편 프로이트(Freud, 1856-1939)는 행동이 아니라 심리적 경험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으로 영유아기 경험이 인간의 성격 발달에 중요하게 작용함을 주장하였습니다. 왓슨(Watson, 1878-1958)은 철저한 환경론자로 인간의 모든 행동이 외부 환경적 요인에 의해 통제될 수 있음을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나한테 12명의 아기를 달라. 그리고 나한테 아기를 기르는 모든 권한을 준다면 각 아기를 어떠한 유형의 사람(교수, 의사, 법률가, 심지어 도둑)으로도 만들 수 있다' 라는 글은 그가 얼마나 영아의 양육, 즉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가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피아제(Piaget)는 자신의 자녀들을 관찰함으로써 인간의 사고가 어떻게 발달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인지단계이론을 발달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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